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탄성미해 殫誠靡懈

백운선사 김대현 2021. 3. 16. 16:51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탄성미해 殫誠靡懈

다할 탄정성 성쓰러질 미게으를 해

 

온 정성을 다하고 게으르지 않다

 

이 성어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학자인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1570~1652)선생의 시문집인 청음선생집(淸陰先生集)에 경상좌도수군절도사박공신도비명 병서(慶尙左道水軍節度使朴公神道碑銘 幷序)에서 발췌하다

 

庚辰 加階擢滿浦僉使 경진 가계탁만포첨사

至則整肅軍政 지칙정숙군정

招撫諸胡 示以威信 胡人感畏 초무제호 시이위신 호인감외

歸其鹵獲漢俘 及正先所冒墾田 귀기로획한부 급정선소모간전

訖公去鎭 無敢有犯禁者 흘공거진 무감유범금자

癸未瓜代 道拜鍾城府使 계미과대 도배종성부사

時北虜構亂 乘傳徑赴 시북로구란 승전경부

設方略 誘降虜酋 설방략 유항로추

責還逋糴數百千 我民男婦五十餘人 책환포적수백천 아민남부오십여인

修城塹備器械練士卒 수성참비기계련사졸

殫誠靡懈 탄성미해

爲忌嫉者所誣 逮繫金吾 위기질자소무 체계금오

會北帥暴其冤 事乃已 회북수폭기원 사내이

西敍護軍 兼領禁衛 又兼內乘 서서호군 겸령금위 우겸내승

德源缺府使 府有鬼祟 덕원결부사 부유귀수

前守相繼暴逝 人皆規避 전수상계폭서 인개규피

公不辭之官 爲文祭土地 공불사지관 위문제토지

怪從此遂絶 未幾罷歸 괴종차수절 미기파귀

 

경진 선조13(1580)에 만포 첨사에 더 높은 품계로 발탁 승진되었다

임지에 이르러서 군정을 엄숙하게 정돈하였으며

여러 오랑캐들을 불러 어루만져주고 위엄과 신의를 보이자 오랑캐들이 감동하고 무서워하며

노획한 한인 포로들을 되돌려 보내고 우선 국법을 어기고 개간한 전지를 바로잡고

공이 진을 떠나갈 때까지 감히 금지한 법을 범하는 자가 있을 수 없었다

계미(1583)년에 임기가 끝나 교체되면서 오던 중에 종성 부사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북쪽의 몽골족이 반란을 일으켜 임금의 명을 받아 역말을 타고 신속하게 달려가서

방법과 계략을 써서 몽골족 추장을 꾀어 투항하게 하고

체납된 곡식 수백 석과 우리 백성 남녀 50여 명을 야단쳐서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성곽과 참호를 수리하고 병기구를 정비하여 사졸들을 강력하게 훈련시켜

온 정성을 다하고 게으르지 않았지만

공을 미워하고 질시하는 자가 무고하여 의금부에 체포되어 갇혔다

때마침 북쪽의 장수 북수가 공의 원통함을 폭로하여 일이 이내 끝이 났다

무관 서반직에 복직되어 호군에 제수되면서 금위도 겸하여 거느리고 또 내승을 겸하였다

덕원의 부사가 결원이 생겼는데 덕원 부에는 귀신 병이 있다면서

전임 수령들이 서로 잇달아 급작스럽게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부임하려하지 않았다

공은 그곳의 관리를 사양하지 않고 덕원으로 가 제문을 지어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리니

괴이함이 이것으로부터 드디어 끊어졌으나 얼마 되지 않아 파직되어 돌아왔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 학자인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1570~1652)선생이 박홍(朴泓)선생의 아들 박정남(朴霆男)의 청탁으로 찬한 경상좌도수군절도사박공신도비문이다

 

비명의 절도사박공은 박홍(朴泓 1534~1593)선생으로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청원(淸源) 할아버지는 박한(朴捍)이고 아버지는 별제(別提) 박영무(朴英珷)이다며 어머니는 직장(直長) 정인걸(鄭仁傑)의 딸이시고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에서 출생하였으며 명종 11(1556)23세로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임명된 이후 강계부판관(江界府判官) 정평부사(定平府使) 종성부사(鍾城府使) 등 외직을 지냈으며 선조 25(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서 왜적의 선봉을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본진을 소각하고 죽령(竹嶺)으로 후퇴 적을 방어하려 하였으나 조령(鳥嶺)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후퇴하였는데 선조가 한성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난 뒤라 행재소(行在所)로 찾아가던 중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을 만나 좌위대장(左衛大將)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에 참여하였으며 이어 신길(申硈) 유극량(劉克良) 등과 함께 병사를 나누어 파주에서 싸웠으나 모두 패해 평양으로 탈출하였으며 평양에 도착한 뒤 사헌부를 위시한 조신들로부터 영토를 지켜야 할 신하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군율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으나 때가 전시이고 또 후퇴하던 과정에 종군한 것이 감안되어 처벌을 면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 평양이 함락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과 함께 평산으로 들어가 병사를 모으고 있던 중 당시 이천(伊川)에 있던 세자의 명을 받고 세자를 호위 시종하면서 성천으로 들어갔으며 우위대장 의용도대장(義勇都大將)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 평양 방면으로 나아가 여러 차례 왜적과 접전했으나 크게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으며 15931월에 평양이 수복되자 김명원을 따라 파주까지 종군하였으나 지병이 재발해 치료를 위해 귀향하던 중 사망하였으며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온 정성을 다하고 게으르지 않다 라는 의미인 탄성미해(殫誠靡懈)의 발췌문을 읽으면서 우리의 삼신산 아래 한반도는 분명 우리 인간이 살기 가장 좋은 아름다운 땅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이 탐이나 잠시도 그냥두지 않고 호시탐탕 침략하고 노략질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이 땅을 빼앗으려는 오랑캐랑 바다건너 왜인들이 그 예전부터 오늘 날까지 괴롭히고 있는 것일 게다 다시는 그런 슬픈 역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튼튼한 국방력과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일에 잠시도 탄성미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자기들 권력에만 눈이 먼 정치협잡꾼들의 말장난에 놀아나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길 바라며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슬러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탄성미해를 담는다

 

桓紀 9218(신축)24일 오후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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