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선사 김대현의 세계/백운선사의 서예세계

[成語文集 白雲筆談] 소시돈사 昭示惇史

백운선사 김대현 2021. 5. 14. 17:38

백운선사 김대현이 붓으로 풀어가는 주머니 속 성어이야기[成語文集 白雲筆談]

 

소시돈사 昭示惇史

밝을 소보일 시도타울 돈역사 사

 

덕행을 돈후하게 쌓은 역사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보여주다

 

이 성어는 조선 후기 성리 학자인 심재 조긍섭(深齋 曺兢燮 18731933)선생의 시문집인 암서집(巖棲集) 권삼십(卷三十)에 돈암 이 처사 묘갈명(遯菴李處士墓碣銘)에서 발췌하다

 

李君 圭衡 平叔袖其王父遯菴處士家狀 리군 규형 평숙수기왕부둔암처사가상

而示余 且曰 이시여 차왈

不肖十有六而王父見背 然得至今粗解文字 불초십유륙이왕부견배 연득지금조해문자

見齒於朋列者 王父之貽也 견치어붕렬자 왕부지이야

吾先人甞擧柳仲塗之說而戒不肖曰 오선인상거류중도지설이계불초왈

皇考治家孝嚴 實無愧於斯言 황고치가효엄 실무괴어사언

汝曹其識之 여조기식지

不肖常懼墜失王父之敎 以負吾先人之志 불초상구추실왕부지교 이부오선인지지

則惟是撰次平日行治 以表墓道 즉유시찬차평일행치 이표묘도

使後人知焉 子孫則焉 사후인지언 자손칙언

以吾子習於文辭 敢以是累焉 이오자습어문사 감이시루언

余與平叔 交未久而分實親 여여평숙 교미구이분실친

知其言之無華 지기언지무화

而其請又屢而力 不敢以辭 중략...이기청우루이력 불감이사 중략...

銘曰 명왈

惟食與敎 王政之端 유식여교 왕정지단

用是爲家 不見其難 용시위가 불견기난

非本之立 曷能就此 비본지립 갈능취차

我最以銘 昭示惇史 아최이명 소시돈사

 

이군 규형 평숙이 그의 조부 돈암 처사의 가장을 소매 속에 넣어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또 말하길

불초가 십여 육세가 되었을 때 조부께서 돌아가셨지만 지금 문자를 대략이라도 알게 되고

치아를 보이며 벗들과 나란히 수 있게 된 것은 조부님께서 끼쳐주신 것입니다

저의 선친께서 일찍이 유중도의 말을 들어 불초에게 경계하며 말하길

선친(조부)님이 집안을 효성스럽고 엄격하게 하여 실로 유중도의 이 말에 부끄럽지 않았으니

너희형제들은 알아두어야 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불초는 조부의 가르침을 실추시키고 그리고 제 선친의 뜻을 저버릴까봐 늘 두려워하며

오직 평소의 행실과 치적을 순서대로 짓고 산소에 표식을 하여

후인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 자손들이 그것을 법도로 삼고자 합니다

우리 그대는 문사에 익숙하시니 감히 이렇게 누를 끼칩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평숙과 더불어 사귄 지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나눈 정분은 참말로 친밀해서

그 말에 가식이 없음도 아는지라

그 부탁을 또 여러 차례 힘을 주어 하니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중략...

명에 이르길

생각건대 먹이고 가르침은 이 나라 왕정의 바름이요

이것으로 집안을 다스리면 그 어려움을 볼 수가 없음이라

근본이 바로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것을 성취하리오

나는 최선을 다해 명을 지어 돈사를 분명하게 보이노라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후기 성리 학자인 심재 조긍섭(深齋 曺兢燮 18731933)선생이 쓴 돈암 이 처사 묘갈명(遯菴李處士墓碣銘) 중에 일부이다

심재 조긍섭선생은 본관은 창녕 자는 중근(仲謹) 아버지는 조병의(曺柄義)이고 선생은 11세 때에 근사록을 10일 만에 베껴 쓰는 놀라운 글재주를 보였으며 17세 때에는 당시 영남의 큰 선비였던 곽종석을 찾아가 태극 성리 등에 관하여 토론을 벌였고 광무 5(1901) 19세 때에는 대구에서 열린 향시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이종기를 방문하였으며 20세를 전후로 장복추 김흥락등을 찾아가 학문에 대해 문답을 하였으며 광무 9(1905) 23세 때에는 남명집을 중간하는 사업에 참가해 여러 선배 문인들과 사귀었고 융희 2(1908) 26세 때에 사서에 대해 의문이 나는 점을 묻기 위하여 다시 김흥락을 만났으며 1910년 합병소식을 듣고서는 두문불출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으며 그리고 동서의 학설을 비교 궁리하여 곤언(困言)을 저술하고 다음해에 부친상을 당하였지만 그러나 학문에 대한 열의가 식지 않아 거빈해 성존심비변등의 논문을 썼으며 부친상이 끝나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스리며 선비의 길을 걷고자 정산(달성 가창 정대리)으로 들어가 숨어 버린 그 뒤에 문박의 서재인 광거당을 오가며 학문에 몰두했으며 그리고 정산서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고 19193월 일본총독과 동포대중에게 보내는 글의 초안을 잡다가 발각돼 17일간 구속을 당하고 1928년 겨울에 문인들의 요청으로 정산에서 비슬산 서쪽인 쌍계로 거처를 옮겨 구계서당을 짓고 후학을 계속 양성하다가 193361세로 돌아가셨다 선생의 곤언은 정통 유학자로서 주체적 사고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글이며 서양의 문화와 제도를 비판적으로 논의하고 있으며 성리학적 저술로는 20세 때에 이진상의 심즉리설을 17조목으로 분석하고 비판한 독심즉리설 심합이기설을 인정하면서도 심은 곧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심문 그리고 전우의 견해를 비판한 성존심비변 성존심비적거변등이 있고 선생은 일정한 스승은 없었으나 타고난 성품이 매우 영특하여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으며 시문에도 법도가 있어 당시 영남 사림에서 거목으로 지목되었고 한말 지식인 가운데에 황현 김택영 이건창 등과 교유하며 그들을 뛰어난 인물로 칭찬했던 점으로 보아 유학자로서의 보수적 경향만을 고집하지 않는 학자였으며 저서로는 암서집(巖棲集) 심재집(深齋集) 4120책 조명록(措明錄) 등이 있다 [한구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덕행을 돈후하게 쌓은 역사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보여주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소시돈사(昭示惇史)라는 멋진 성어를 남기신 심재선생이 쓴 비문 등을 읽으면서 살아 있는 이 순간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어주심에 감사하며 휘호하고 문집에 담는다

 

桓紀 9218(신축)43일 오후에 白雲仙士 金大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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